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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사례로 본 지역 산학협력 모델과
한국의 초광역 전략
임종빈 경기도경제과학진흥원 AI 본부장

오늘날 혁신은 단일 기술의 발명을 넘어 주체 간의 긴밀한 ‘연결’과 ‘협력’을 통해 완성되는 집단적 과정으로 확장됐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산학협력과 혁신클러스터는 지역과 국가 경쟁력을 견인하는 핵심 동력으로 자리 잡았다.
미국, 독일, 일본 등 해외 선진 사례를 거울삼아 대한민국 ‘5극 3특’ 초광역 전략이 성공적인 혁신 생태계로 거듭나기 위한 구체적인 해법을 모색해본다.

혁신Innovation은 오랫동안 경제성장과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개념으로 논의되었다. 그러나 혁신을 단순히 신기술 등장이나 연구 성과 축적으로 이해하던 시대는 지났다. 혁신에 대해 가장 먼저 주목했던 슘페터J. Schumpeter는 혁신을 ‘새로운 결합의 실현’으로 정의하며 기술 발명 그 자체보다 경제구조를 변화시키는 힘에 주목했다. 그는 신제품 등장뿐 아니라 새로운 생산방식, 새로운 시장 개척, 조직 형태의 변화까지 모두 혁신의 범주에 포함했다.

이후 혁신 개념은 더욱 확장되었다. OECD는 혁신의 측정에 대한 국제적 기준 지침서 <오슬로 매뉴얼>을 발간하면서 혁신에 대해 “새로운 또는 현저하게 개선된 제품이나 공정, 새로운 마케팅 방법 또는 조직 운영상의 새로운 방법을 비즈니스 관행, 작업장 조직 또는 외부 관계에 구현하는 것”이라고 정의하며 지식이 경제적·사회적 가치로 전환되는 전 과정을 강조했다. 이는 연구개발R&D뿐 아니라 제도, 인력, 네트워크, 문화까지 포괄하는 개념으로 재정립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정의가 중요한 이유는 혁신을 결과가 아닌 과정으로 인식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즉 혁신의 성패는 기술 수준만이 아니라, 지식이 얼마나 빠르고 효과적으로 확산·결합되는가에 달려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늘날 혁신은 더 이상 고립된 개인이나 단일 기업의 성취가 아니다. 혁신은 본질적으로 집단적이며 네트워크적이다. 여러 주체가 연결될수록 혁신의 속도와 파급력은 커진다. 바로 이 지점에서 산학협력이 핵심적인 의미를 갖는다.

산학협력은 단순한 산·학 간 공동 연구나 기술이전을 넘어선다. 대학은 지식과 인재의 공급원이며, 기업은 이를 시장가치로 전환하는 주체다. 정부는 이 둘을 연결하는 제도적 촉매 역할을 수행한다. 에츠코위츠와 레이데스도르프가 제시한 ‘트리플 헬릭스Triple Helix’ 이론은 이 세 주체의 상호작용이 혁신을 창출하는 기본 구조임을 설명한다. 이후 이 이론은 금융·시민사회·지역공동체까지 포함하는 ‘쿼드러플 헬릭스’ 논의로 확장되었지만, 여전히 산·학·관 협력은 혁신 시스템의 중심축으로 기능한다.

산학협력과 클러스터, 혁신의 필수 조건
그러나 산학협력은 선언만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대학은 장기 연구를, 기업은 단기 성과를, 정부는 정책 목표를 우선시한다. 이 혁신 주체들이 지속적으로 협력하기 위해서는 이들 간에 얽혀 있는 이해관계와 시간 축을 효과적으로 연결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와 공간적 기반이 필요하다. 이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바로 ‘혁신클러스터Innovation Cluster’다.

마이클 포터는 클러스터를 “특정 산업 분야에서 상호 연관된 기업·연구기관·공급망·지원조직이 지리적으로 집적된 상태”로 정의하며, 클러스터가 생산성 향상과 혁신 가속, 신산업 창출을 동시에 이끈다고 분석했다. 혁신클러스터는 단순한 산업단지나 연구단지가 아니다. 지식·인재·자본·데이터가 빠르게 순환하며, 우연한 만남과 반복적 협력이 혁신으로 이어지는 생태계다. 이러한 이론적 논의는 해외 주요 국가의 지역 혁신 전략에서 정책 수단으로 활용되며 현실로 구현돼왔다.
실리콘밸리에서 EU까지, 글로벌 클러스터의 성공 방정식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혁신클러스터는 미국의 실리콘밸리다. 물론 실리콘밸리는 정부의 정책에 따라 조성된 혁신클러스터가 아니라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혁신클러스터다. 하지만 많은 국가에서 실리콘밸리의 성공 사례를 벤치마킹해 정책에 활용하고 있는 만큼, 자연발생적이라는 다른 특징을 갖고 있지만 반드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실리콘밸리는 단기간에 정책적으로 조성된 산업단지가 아니라 수십 년에 걸친 정책·연구·시장 메커니즘이 축적된 결과물이다. 스탠퍼드대와 UC버클리를 중심으로 한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 역량, 국방부·NASA 등 연방정부의 장기적 R&D 투자, 그리고 이를 사업화하는 벤처캐피털 시장이 맞물리며 독보적인 혁신 생태계가 형성됐다.

실리콘밸리 모델의 핵심은 ‘지역 자율성과 국가 전략의 공존’이다. 연방정부는 특정 지역을 지정해 산업을 배분하지 않았다. 대신 기초연구와 도전적 기술개발에 대한 장기 투자를 지속했고, 규제 유연성을 통해 민간의 실험을 허용했다. 그 결과 혁신의 방향은 지역의 대학·기업·투자자가 주도했고, 이는 다시 미국 전체의 기술 패권을 뒷받침하는 기반이 되었다.
대학의 연구 역량, 정부의 장기 R&D 투자, 벤처 자본이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자생적인 혁신 생태계를 이룬 미국 실리콘밸리의 전경.
독일의 산학협력 모델은 미국 실리콘밸리와는 다른 경로를 보여준다. 독일은 프라운호퍼연구소를 중심으로 기초연구와 산업 현장을 연결하는 ‘중간 조직’을 제도화했다. 프라운호퍼연구소는 순수 학문 연구보다는 산업수요에 기반한 응용·실증 연구에 집중한다. 연방정부와 주정부가 연구비를 공동 부담하고, 연구 성과는 기업으로 이전된다. 이 구조는 대기업뿐 아니라 지역 중소·중견기업의 기술경쟁력을 끌어올리는 데 크게 기여해왔다.

독일 사례의 중요한 특징은 지역 혁신이 국가 산업 경쟁력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는 점이다. 특정 지역의 기술 성과는 독일 제조업 전체의 경쟁력 강화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국가 차원의 산업 전략을 지탱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든다. 지역과 국가가 분리된 단위가 아니라 하나의 시스템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일본 역시 지역 혁신 전략을 재편하고 있다. 쓰쿠바 사이언스시티는 대학과 국책연구소 집적을 통해 기초연구 허브로 기능해왔고, 간사이 광역 바이오·헬스 클러스터는 오사카·교토·고베를 연결하는 초광역 협력 모델로 진화 중이다. 특히 일본 정부는 최근 지역 간 중복 투자와 경쟁의 비효율성을 인식하고, 광역 단위의 역할 분담과 네트워크형 클러스터 구축에 정책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이는 단일 지역의 완결성보다 연결된 지역들의 집합적 경쟁력을 중시하는 방향을 지향한다.

유럽연합EU의 스마트 특화 전략Smart Specialisation Strategy도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EU는 각 지역이 모든 산업을 육성하려는 방식이 오히려 혁신을 저해한다고 판단하고, 지역별 비교우위에 기반한 선택과 집중을 유도해왔다. 동시에 국가 간·지역 간 협력을 통해 초국경 혁신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이는 지역 특화와 초광역 협력이 대립 개념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이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응용·실증 연구를 주도하며
독일의 기술경쟁력을 뒷받침하는 프라운호퍼연구소.
초광역 바이오·헬스 클러스터의 역동성을 보여주는
오사카 간사이 엑스포 현장.
각 지역의 비교우위에 기반한 ‘스마트 특화 전략’을 통해 선택과 집중,
그리고 초국경 협력을 동시에 추구하는 유럽연합.
이러한 해외 사례의 공통점은 분명하다. 첫째, 산학협력은 선택이 아니라 국가 혁신전략의 필수적 핵심 수단이다. 둘째, 혁신클러스터는 행정구역이 아니라 기능과 네트워크를 기준으로 설계되어야 한다. 셋째, 지역 특화는 분산이 아니라 전략적 선택과 집중의 결과로 봐야 한다. 넷째, 지역 혁신은 언제나 국가 전략과 긴밀히 연결되어야 한다.
세계는 지금 ‘지역 특화’와 ‘네트워크’에 주목한다
이러한 시사점은 우리나라의 ‘5극 3특 국가 균형성장 전략(이하 5극 3특 전략)’이 좀 더 효과적으로 기능해 조기에 성과를 창출하는 데 보완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5극 3특 전략’은 수도권·충청권·동남권·대경권·호남권 등 5대 초광역 성장거점과 강원·전북·제주 등 3대 특별권역을 중심으로 산업·인재·R&D를 재배치하겠다는 것으로, 기존 균형발전 정책과는 분명히 다른 접근이다. 과거 정책이 행정구역 단위의 분산에 가까웠다면, 이번 전략은 기능 중심의 재편과 초광역 협력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진일보했다.

이 전략의 핵심 키워드를 정리하면 △초광역 협력 △산업·기술 특화 △기능 중심 재편 △연결과 분업이라 할 수 있다. 방향성 자체는 해외 혁신클러스터 전략과 상당 부분 맞닿아 있다. 그러나 전략의 성공 여부는 방향이 아니라 구현의 완성도에 달려 있다.
‘5극 3특’, 행정 구역을 넘어 ‘초광역 생태계’로
‘5극 3특 전략’이 성공하려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구현돼야 한다.

첫째, 초광역 전략과 국가 R&D 정책의 구조적 정합성을 높여야 한다. 현재 우리나라의 R&D 예산은 부처별·과제별로 분절돼 있으며, 초광역 단위의 공동 기획과 장기 로드맵은 여전히 미흡하다. 해외 사례처럼 초광역 거점을 중심으로 한 대형·장기 연구 프로그램을 설계하고, 예산 배분 단계에서부터 지역 간 연계를 전제로 하는 구조 전환이 필요하다.

둘째, 국가 산업 전략과 지역 특화 전략 간 역할 분담을 명확히 해야 한다. 중앙정부는 글로벌 기술 경쟁에서 국가가 집중해야 할 핵심 기술과 산업 방향을 제시하고, 지역은 이를 구현하는 실행 단위로 기능해야 한다. 현재처럼 중앙과 지역이 유사한 정책을 중복 추진하는 방식으로는 초광역 협력의 시너지를 기대하기 어렵다.

셋째, 대학과 공공 연구기관의 역할을 혁신 시스템 관점에서 재정립해야 한다. 해외 혁신클러스터에서 대학과 연구기관은 단순한 연구 수행 주체가 아니라, 인재·기술·창업을 연결하는 ‘앵커 기관’으로 기능한다. 우리 역시 지역 거점 대학과 출연연이 교육과 연구를 넘어 산업과 창업을 연결하는 핵심 허브가 되도록 제도적 권한과 책임을 부여해야 한다.

넷째, 인재 정책을 지역 혁신전략의 중심에 놓아야 한다. 혁신클러스터의 성패는 결국 사람에 달려 있다. 지역 간 인재 이동을 촉진하고, 초광역 단위에서 연구·창업·취업이 연계되는 인재 순환구조를 설계하지 않는다면 공간 중심 전략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초광역 협력을 실질적으로 작동시키는 국가 차원의 거버넌스가 필요하다. 각 극과 특이 경쟁적으로 성장하기보다, 기술·데이터·인프라를 공유하는 협력 네트워크로 진화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중앙정부의 조정기능과 지역 주도의 실행 역량이 균형을 이루는 새로운 거버넌스 모델이 요구된다. 지역 균형성장은 이제 ‘지역에 무엇을 나눠줄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다. ‘각 지역이 어떤 기능으로 국가 혁신과 지역 성장에 어떻게 기여할 것인가, 어떻게 상생할 것인가’를 묻는 전략의 문제다. 해외 사례가 보여주듯, 강한 지역은 전략적 방향성과 지속적 실행에 의해 다져진다. 5극 3특 전략이 이러한 방향으로 구체화되고 성숙해간다면, 이는 단순한 지역 정책을 넘어 한국형 혁신 국가로 나아가는 구조적 전환의 핵심축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임종빈 경기도경제과학진흥원 AI 본부장
기술경영 전공으로 박사학위 취득 이후 혁신클러스터와 지역 혁신 분야에서 현장 실무 경험을 바탕으로 다양한 연구를 수행했다.
현재는 경기도경제과학진흥원에서 AI 본부장을 맡아 혁신 이론의 정책적 구현에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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